문화



[종합] '조씨고아' 고선웅 "블랙리스트? 발상·실천이 신기해"

 

"제 이름이 청문회에 나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제가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지 전혀 몰랐거든요. 그런 게 떠돈다는 이야기는 들었죠. 근데 (청문회) 내용은 제게 나쁠 것이 없더라고요."

공연계에서 가장 핫한 연출가인 고선웅이 연극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 재공연을 앞둔 17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다가, 빠진 사실을 청문회로 알게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9일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최순실 국조특위 7차 청문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모 사업별 검토 내용' 내부 문건을 공개하면서 고선웅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가 과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푸르른 날에'를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2015년 고선웅과 국립극단이 협업한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을 본 박민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작품이 너무 좋다며 그를 블랙리스트에서 제외할 것을 요청, 결국 그는 이 명단에서 빠졌다.

이 사실이 알려진 직후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고선웅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 대한 작품성이 연극계뿐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인식이 됐다.

고선웅은 이 사실이 알려진 당일 배우 임홍식(1954~2015)이 많이 그리웠다고 했다. 임홍식은 2015년 11월19일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당시 갑작스런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이 작품의 출연분량을 모두 연기했다.

고선웅과 배우들, 국립극단은 애초 당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남은 회차인 같은 달 20~22일 공연을 모두 취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끝까지 무대를 지킨 고인의 뜻을 받아들여, 슬픔과 애도 속에 공연을 마쳤다.

 "(이번 청문회로 작품이 다시 알려진 건) 임 선생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 같아요. 시국도 그렇고 공연이 잘 안 되는 시기인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잘 되라고 하늘에서 응원해주시는 거죠. 그날 술을 많이 먹었어요. 임홍식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죠."

 '푸르른 날에'는 블랙리스트에 오를 작품이 전혀 아니라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고 했다. 2011년 초연 이후 2015년까지 매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하며 '5월의 연극'으로 자리매김했던 '푸르른 날에'는 5·18 민주화운동 속에서 꽃핀 남녀의 사랑과 그 후 30여 년의 인생 역정을 구도(求道)와 다도(茶道)의 정신으로 녹여냈다.

평소 고선웅은 연극에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지난해 국립극단과 두 번째 협업물인 창작극 '한국인의 초상'에서도 한국의 민낯에 현미경을 가까이 들이대면서 정치적이고 민감한 문제는 제외했다.

 "정치적이나 종교적인 성향을 작품에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극장에는 무작위로 사람들이 오는데 어떤 성향을 안 좋아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카타르시스를 느끼려고 오시기 때문이에요."

고선웅이 연극계 뿐 아니라 뮤지컬 '아리랑',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개·폐막식 총연출 등 대형 공연의 연출을 맡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그가 블랙리스트일 거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저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에) 놀랐고, 조금도 생각은 안 했는데, 젊은 친구들에게 떳떳해지네요. '나도 있었다'는 거죠."

지난해 10월 28일, 29일 양일간 중국 베이징 국가화극원 대극장 무대에 올라 현지 언론과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다. 중국 국가화극원 부원장 루오다준 역시 "원작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감동적"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선웅은 "중국에서 경험이 제게는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라는 걸 깨닫게 했어요. 중국에서 (원나라의 대표 연극 형식인) '잡극(雜劇)을 어떤 식으로 올리는지 몰랐고 각색까지 한 대본인데다가 미니멀했기 때문이죠. 중국은 화려한 걸 좋아할 것 같았는데 집중력 있게 보시더라고요. 박수도 크게 나오고. 연극은 만국의 공통어라는 걸 깨달았어요."

무조건 재공연이 초연보다 낫다고 강조한 고선웅은 "그 만큼의 내공이 생기기 때문"이라며 "배우들이 1년이 지나면서 생긴 캐릭터에 대한 숙성, 자아가 쌓여서 작품이 그 만큼 두꺼워지고 깊이가 생긴다"고 했다.

재공연에서 중용을 지키는 것도 고선웅에게는 중요한 몫이다. "별 건 아니에요.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데 잘 조절하는 거죠. 연극은 자연발생적으로 자가 발전해요.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낚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저는 가만히 있는 거죠. 제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연극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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