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황금 연휴? 은행원은 '괴롭다'

기준금리 연 1.25% 인데···은행 이자이익 높아
'갈 곳 잃은 돈' 등 몰려 순이자마진 증가 영향
지점수·인력감축 불가피···은행원 삶은 팍팍하기만


“황금 추석 연휴라지만 쉰다는 건 곧 뒤처지는 겁니다. 실적 채우려면 고향의 가족과 친지, 동네 어르신, 초중고 친구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계좌도 만들고 펀드 상품도 맹렬히 팔아야죠.”


 말쑥한 외모, 세련된 매너, 늘 웃음 띤 얼굴···전도유망한 뱅커의 전형적 모습이랄까. 50대 초반의 그는 서울 시내에서 잘나가는 은행 지점장이다. 내년 본부장 승진을 바라보는 그는 하지만 속으로 골병 들고 있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매일 전국 지점장 성적이 나오는데 저는 다행히 1000명 가운데 최상위권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구역별로 실적을 따지기 때문에 저희 지점만 잘해서는 안돼요. 좀 떨어지는 이웃 지점까지 서포트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렵습니다.”


 초저금리 시대에도 은행들은 이자 장사로 사상 최대의 순이익을 내는 등 손쉽게 돈을 번다고 하지만, 은행원들의 삶은 고단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이른바  '잘 나가는' 자신도 이런데, 실적이 뒤처지는 지점장들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각종 질병을 달고 살면서 짐 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 은행들의 성적표만 보면 저금리 시대가 무색할 만큼 눈부시다. 올 상반기 8조1000억원이 넘는 순이익을 달성해 지난해 상반기 3조원 보다 5조1000억원 확대됐다.


  이자이익은 지난해 상반기보다 1조1000억원 늘어 18조원에 달했다. 은행들이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시중 부동자금이 몰리면서 예금금리가 하락한 반면 주택거래 등이 활발해지면서 대출 수요는 늘어난 덕분이다. 은행들이 '앉아서 돈을 벌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도 은행들의 위기 의식은 상당하다. 급변하는 디지털 기술 혁신, 인터넷전문은행 등장 등으로 비대면 거래는 늘고 모바일 거래가 활성화하는 등 큰 변화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 환경이 녹록지 않아지면서 은행 내부적으로 실적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승진 적체, 인력 감축 등을 겪고 있어 은행원들은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인간' 은행원끼리만이 아니라 대출과 펀드 상품을 추천하는 'AI' 은행원과도 경쟁해야 하는 시기도 멀지 않았다.


  외견상 화려해 보이고 연봉도 쏠쏠하다는 이야기에 이 길로 들어섰지만 하루 하루 치이다 보나 정말 잘 선택한 것이 맞는지 회의가 든다는 은행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시중에 갈 곳을 잃은 단기 부동자금은 올 2분기 기준 1040조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 돈은 은행의 요구불예금이나 수시입출식예금, 단기 정기예금, 양도성예금증서(CD) 등에 고스란히 쌓였다. 은행들이 딱히 예금금리를 높게 주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것이다.

 

  요구불예금 등은 은행 입장에선 조달비용이 거의 들지 않아 순이자마진(NIM) 상승 등 이자이익에 도움이 됐다. NIM은 운용자산 수익에서 조달비용을 뺀 나머지를 전체 운용자산 총액으로 나눈 수치다. 이러한 가운데 주택담보대출 등 대출 운용자산까지 늘면서 NIM의 하락세가 더욱 개선됐다. NIM은 지난해 하반기 1.54%에서 올 상반기 1.61%로 상승했다.


  결국 예금금리가 낮아졌지만 대출금리를 높게 유지하면서 은행들이 수익을 올렸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실제 예대금리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8월중 금융기관 가중평균금리' 통계에 따르면 잔액 기준 예대금리차는 2.26%p로 지난해 말(2.19%p)보다 0.07%p 확대됐다.


  안배영 금융경제연구소 이사는 "은행은 예대마진 감소세에도 꾸준한 예수금과 대출금 증대에 힘입어 이자이익과 비이자이익을 포함한 총이익이 매해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은행의 총자산 증가로 인한 상쇄효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판매실적 '줄세우기'···치열한 경쟁에, 은퇴 후 삶도 '갑갑'

  은행의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영업 관행에 대한 시선은 곱지만은 않지만 사실 행원들의 업무는 고달프다. 핀테크 산업 발전과 인터넷·모바일 뱅킹 확대로 지점 수와 인력 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이면서 은행권의 실적 경쟁은 더욱 격화됐기 때문이다.


  바깥에서는 평균 연봉이 8000만원에 달하는 만큼 부러운 시선을 받는 '엘리트 직장인'이지만 은행 안에서는 실적을 채우는 데에 급급하다. 금융경제연구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7월 전국 14개 은행지부 7만42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은행원들의 65%가 은행 생활을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과도한 실적경쟁'을 꼽았다.


  A은행의 모 지점 영업창구에서 근무하는 김모(30·여)씨도 매달 팔아야 하는 상품 할당량이 정해져있어 압박이 심하다. 청약상품 20건, 각종 적금 20건, 방카슈랑스 10건, 주가연계신탁 17건, 개인형 퇴직연금 10건 등 가짓 수만도 만만치 않다.


  매일 전직원의 판매 실적을 집계해 일렬로 공개하고 실적이 좋은 직원에게는 그 자리에서 포상을 하기도 해 직원들이 경쟁하게끔 한다. 그는 "상사가 신상품 카드 판매갯수가 0개인 직원 명단을 올리라고 한 적도 있다"며 "하루 실적을 못 올렸다고 일을 안한 것도 아닌데, 눈치가 보일 수 밖에 없다. 조직 전체가 이제 이런걸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때문에 김씨는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까지 소개받아 상품 판매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번번이 상품을 팔지 못하고 거절당하는게 일쑤인 김씨는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치열한 승진 경쟁을 뚫고 겨우 고위직으로 올라가도 압박은 계속된다. 실적을 제대로 올리지 못하면 조직 내에서 도태되는 등 실적이 곧 인사로 직결되는 탓이다. B은행의 지점장으로 근무 중인 최모(51)씨는 "지점별로 평가를 해서 하위권을 몇차례 맴돌면 '대기발령'을 내버린다"며 "가늘고 길게 가려고 일부러 지점장 승진을 피하고 본점 관리부서 등에 남는 경우가 적잖다"고 귀띔했다.


  간부급이 많아 '항아리형 인력' 구조를 지닌 은행권의 승진 적체현상도 행원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입사 20년차인  조모(48)씨는 승진 자격을 얻은 건 4년 전이지만 부족한 승진 'TO(정원)' 때문에 아직까지 과장이 아니라 과장 '보'다. 조씨를 제치고 먼저 승진해 팀장 자리를 꿰찬 후배도 있다.


  그는 "조직 생활이 다 그렇다"며 웃어 보이면서도 "막 고등학생이 돼 곧 입시 전쟁에 돌입할 아들 생각을 하면 답답하다. 돈 들어갈 곳이 한 둘이 아니라 막막한데, 대체 언제쯤 승진이 결정될지 기약이 없다"며 이내 한숨을 쉬었다.


  은퇴 시기가 가까워지면 행원들의 심경은 더욱 복잡해진다. 반평생을 은행에 앉아서만 일한 터라 은퇴 이후 사업에 나서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정년을 코 앞에 둔 부장급 이모(58)씨는 "은행원은 가만히 앉아서 돈 줄을 쥐고 굴리는 일종의 '절대 갑'인 대신 그만큼 리스크를 끝없이 관리해야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성향"이라며 "폐쇄된 조직에 있다가 정작 사회에 나가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 그런지 동료들 중에 사업에 나선 이들 '열에 아홉'은 실패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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