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그곳에서 너덜대는 도배지…연기백 '곁집'

  • 등록 2015.10.12 1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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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더 띄거나 더 안 띄거나, 둘 중 하나다.

아직은 눈에 안 띄는 쪽이다. '설마 작품일까', 카페에 앉은 사람 누구도 그것을 눈여겨 보지 않는다. 

명품매장과 독특하고 세련된 건축물들이 즐비한 서울 청담동 건물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작은 집'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작은 집'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오래되어 보인다. 원래 있어도 없어도 되는 '곁집'이다.

송은아트스페이스 1층 카페가 있는 마당의 '곁집'은 연기백(41)의 작품이다. 지난 6일 개막한 개인전에 나왔다. 설치 영상등 9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송은문화재단이 신진 작가들의 '새로운 도전을 지원'하는 전시답게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다. 상업성보다는 비엔날레급 전시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전시장 안에서는 '첨단의 거리'인 밖과는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있다. 

진한 갈색으로 녹이 슨 철판들이 바닥에 전시됐고, 그 위에는 빗물받이들이 어지럽게 허공에 매달려있다. 1960~70년대 주택 트렌드였던 판잣집이다. 빗물받이는 양철지붕에 물을 떨어뜨리며 '빗소리의 추억'을 재생한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우리사회의 모습이다. 한국 가옥에 등장한 빗물받이는 서구식 고층 건물이나 비가 많이 내리고 목조가옥이 대부분인 일본 건축양식에 적합한 장치였다. 추녀가 긴 한옥에 굳이 필요 없는 곁집의 형태였다. 근대화로 유입된 빗물받이는 오늘날 부식을 막고 빗소리를 줄여 효율성을 극대화한 구조로 생산되고 있지만, '아파트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젠 자취를 찾기 어려운 물건이다.

전시장 2층에서 작가의 작업세계는 극대화된다. 특히 '도배 프로젝트'는 그의 편집증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교남동, 가리봉동의 버려진 집에서 뜯어냈다는 벽지가 마치 고서화처럼 설치됐다. 오래된 집은 작가의 보물창고다. 인디애나 존스의 '황금 무덤' 부럽지 않은게 벽에 바른 도배지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누렇다 못해 진한 커피색으로 변한 벽지앞에서 "이건 1963년도 신문인데,이런 걸 볼때마다 흥분되죠"라고 했다. 

도배지를 뜯어내는 작업은 보물 발굴작업처럼 신중하게 치러진다. 오랜 시간 덧발라진, 여러 겹으로 도배되었던 벽지 층을 작가가 직접 뜯어낸다. 물에 불려 하나씩 분리한 후 건조한다. 수십년 전에 발라진 도배지에 남겨진 낙서와 여러 흔적은 작가를 열정에 들뜨게 한다. 수많은 사연이 깃든 도배지들은 한벽, 한벽에 달라있던 것처럼 전시장에 설치됐다. 뜯기다 찢긴 그대로 낚싯줄로 이어붙인 도배지들은 너덜너덜해 보이긴 해도, 한자리에 모이니 고미술품 같은 운치마저 자아낸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버려지는 일상의 삶의 흔적들을 수집하는 작가는 현대사의 이면에 숨겨진 가치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지역과 건물을 매개체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생된 산물과 삶의 이야기들을 고찰한다.

2010년 '냉천만물상'이 시작이었다. 동네에 버려진 물건들을 수거해 필요한 이들에게 빌려주고 돌려받는 중개소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기능이 상실된 채 표류하는 물건들을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욕망의 지표로 바라보고 부지불식중에 간과된 가치들을 재고하는 작업이었다. 

그때 이웃으로부터 우연히 건네 받은 자개장의 몸체와 자개를 낱낱이 떼어 나무 본체들을 전시장 벽에 나열하고, 뗀 자개 하나하나를 낚시 줄에 매달아 자개장에 박혀있던 순서대로 맞춰 공중에 재배열한 '그린하이츠' (2011)와 작가가 이사 온 당시 방 벽지를 뜯어 전시장 천장에 매달아 이전 방의 흔적을 재현한 '인왕산이 보이는 남쪽 창이 있는 방'(2013)은 미술계가 그를 주목하게 한 작업이 됐다. 일상의 면모를 주목하여 고유한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탐색이 작가의 특징이다.

가난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곁집을 짓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나의 작업 태도인 것 같다"며 "가난의 상징을 걷어내면 판잣집은 그저 우리 주변 삶의 이야기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낡고 성하지 않은 물건과 공간으로 채운 이번 전시는 최첨단 유행의 거리에서 현대화의 속도를 늦추게 한다. 잊히고, 가려져 있고, 가장자리로 밀려난 물건들을 통해 편중된 가치관에 매몰되지 않도록 무뎌진 정신을 환기시킨다. 전시는 11월 28일까지. 무료. 02-3448-0100 


정춘옥 kimm1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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