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박 전 상무의 굳게 닫힌 입이 얼마나 열리느냐가 수사의 '한 칸'을 채우는 변수가 될 수 있는 만큼 검찰로서는 박 전 상무의 구속으로 수사에 동력이 붙는 동시에 적잖은 부담도 안게 됐다.
검찰은 금품 공여자인 성 전 회장이 사망한 데다 금품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당사자들이 전면 부인하고 있고 성 전 회장의 핵심 측근마저 진술을 회피해 당분간 본류인 금품 전달보다 지류인 증거인멸 쪽에 무게를 두고 속도감있게 수사를 전개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수사팀 관계자의 말처럼 지류가 본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증거인멸 의혹에 대한 수사에 성과를 내기 위해선 '성완종 리스트'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객관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장부'의 행방을 찾는 게 가장 급선무다. 장부를 둘러싼 의혹을 빠른 시일내에 해소한다면 '리스트' 수사를 단기간에 본 궤도로 끌어올릴 수 있다.
검찰은 현재로서는 성 전 회장의 측근들이 압수수색을 전후해 중요 자료를 빼돌렸다면 장부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성 전 회장의 성격이 꼼꼼한 만큼 정치권 로비 내역을 담은 장부를 별도로 작성·관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세 차례 압수수색에서 장부가 발견되지 않은 만큼 성 전 회장의 지시나 승인 아래 측근들이 장부를 폐기·은닉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반면 장부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성 전 회장의 측근들 뿐만 아니라 가족마저 한결같이 장부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박 전 상무를 중심으로 한 측근들이 빼돌린 자료가 회사 비자금 조성을 위한 분식회계와 관련된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만약 검찰이 회계자료를 추가로 확보하더라도 비자금 중 일부가 정치권으로 어느 시점에, 어떤 방법으로 유입됐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비자금 장부가 몇 박스 분량이 아닌 노트 한 두 권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상식적으로 트럭까지 동원해 장부를 빼돌렸을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도 있다.
성 전 회장 외에 증거인멸을 지시한 다른 배후가 있거나 추가로 증거인멸이 이뤄졌는지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검찰 등에 따르면 증거인멸은 특수1부의 압수수색(3월18일) 이전에 한 차례, 특별수사팀의 첫 번째 압수수색(4월15일) 이전에 한 차례씩 총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차 증거인멸은 성 전 회장의 강제적인 지시보다는 이미 언론에 경남기업이 수사대상이라는 보도가 나왔던 만큼 직원들에 의해 사전 대비 차원에서 이뤄졌고, 2차 증거인멸은 성 전 회장이 '추가 압수수색이 들어올 것 같으니 정리할 건 정리하라'고 지시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증거인멸에 가담한 경남기업 직원들은 '박 전 상무의 지시에 따라 사내 폐쇄회로(CC)TV를 꺼둔 채 다수의 자료들이 지하주차장 등을 통해 반출됐다'는 취지로 진술하며 박 전 상무를 증거인멸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했다.
박 전 상무는 성 전 회장 지시에 따라 '작업'이 이뤄졌기 때문에 자신은 주범이 아닌 공범에 불과하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한 정황이 짙은 만큼 박 전 상무가 측근들과 공모해 여러차례에 걸쳐 증거인멸에 관여했을 개연성도 높다.
일각에서는 성 전 회장 측근들이 증거를 인멸·은닉하는 과정에서 외부 세력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의혹도 커지고 있다.
특히 성 전 회장이 사망한 9일 이후에 메모지에 오른 정치인 8명이 공개된 시점에서 추가로 증거인멸이 이뤄졌다면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을 배후로 의심해 볼 만하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리스트에 오른 8명이 성 전 회장 측근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압력을 넣고 '입막음'을 시도한다는 잡음이 불거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완구 국무총리는 비서관들을 통해 전(前) 운전기사 윤모씨를 회유했으며, 외가쪽 인척을 통해 수사상황을 알아봤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홍준표 경남도지사 역시 지인들을 통해 자신에게 현금 1억원을 전달한 의혹이 제기된 윤모 전 부사장을 회유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이 성 전 회장 측근들에게도 증거인멸을 지시하거나 부탁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은 성 전 회장 사망 이후 측근들의 통화내역과 문자메시지, e메일 내역 등을 분석하며 정치권과의 부적절한 접촉한 정황이나 단서가 있는지 확인할 것으로 알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