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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범, 왜놈 잡아먹었다면?…박훈정 감독 '대호'의 자존심

잘 만든 한국형 누아르 ‘신세계’(2013)를 연출한 박훈정(41) 감독은 ‘센 영화’를 쓴 시나리오 작가로도 유명하다. ‘부당거래’(2010), ‘악마를 보았다’(2010)가 대표적이다. 스스로 밝힌대로 “욕망이 들끓는 사람들끼리 물고 물리는 음모와 배신의 드라마를 건조하게 그려가는 걸” 좋아한다.

‘대호’는 자칭 ‘청불 감독’이 만든 12세 관람가 영화다. 박 감독이 “도무지 내 영화 같지 않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대호’ 역시 박 감독이 낳은 자식이다. 배고픈 작가 시절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라는 소재에 매료돼 쓴 시나리오다. 자신이 직접 연출하게 될 줄 몰랐고, 판권이 돌고 돌아 ‘신세계’를 제작한 사나이픽처스가 제작사로 확정되고, 배우 최민식이 캐스팅이 되고, NEW가 투자배급사로 확정된 후에도 자신이 이 영화에 합류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던 이 작품”의 감독으로 이끌었다.

“이 영화에는 악역이라고 할 만한 캐릭터가 없다. 특히 천만덕(최민식)은 욕망이 거세된 캐릭터다. 일본 고관인 마에조노(오스기 렌)도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다. 조선호랑이 가죽을 너무 갖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내 성향과 안 맞는다.”

“너무 힘든 프로젝트니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운명이랄까, 인연이랄까. 업이다. 내가 썼으니까 내가 마무리 짓는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산 속 촬영도 힘들었고, 보이지 않는 호랑이 연출도 어려웠다. 쉬운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자체가 뿌듯하다. 욕심이라면 작품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성과가 나길 바란다.”

‘대호’는 한국영화사상 전대미문의 시도인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성공리에 부활시켰다. 호랑이 대역배우까지 기용한 촬영에 사실적인 CG, 그리고 호랑이의 감정까지 살려낸 사운드까지 3박자의 조화가 이뤄낸 주목할 성과다. 덕분에 호랑이의 부성애에 자연스럽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일제의 ‘해수 구제정책’으로 사라져버린 조선범의 상징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되새겨보게 하는 영화라는 점도 유의미하다. 호랑이로 상징되는 조선의 얼과 혼이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고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단순히 일본 대 조선의 이분법으로 한정한 것도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치욕을 작품 전반에 깔면서 인간 대 자연의 대결로 좀 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창작자의 강단이 없다면 조선범이 일본군을 잡아먹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물론 민족주의를 자극하면 흥행에 도움이 됐을는 지도 모른다. 조선범이 일본군을 물어 죽이는 장면을 넣으라는 압박을 받았을 법도 하다. 박 감독도 인정했다. “촬영할 당시 반 농담으로 그런 얘기가 있긴 했다. 조선의 호랑이가 ‘마에조노’를 먹어 죽여야 하지 않느냐. 시나리오 단계에서 비슷한 언급이 있었는데, 내가 오버인 것 같다고 했다.”

대호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제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밀고 들어와 자신의 가족을 해쳤다. 지리산 산군이자 아버지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조선인이건, 왜군이건 모두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적일 뿐이다.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악이다. 대호를 잡으려고 산을 파괴하는 그 자체로 그들의 악함이 드러난다. 덧대면 과하다고 봤다.”

대호의 명예로운 죽음이야말로 박 감독이 신경 쓴 부분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가 어떻게 최후를 맞이할지 관심이 집중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자존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대호’의 엔딩은 이런 바람을 충족시킨다.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조선의 마지막 포수도 마찬가지, 두 존재는 다른 듯 닮았다.

“처음에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에 집중했다. 그러다 자료를 찾다보니 호랑이는 명포수의 손에만 죽더라. 포수의 말에 따르면 사냥을 허락해준다더라. 그래서 마지막 명포수 캐릭터를 만들게 됐다.” 당시 호랑이 잡은 뒤 일본군이 찍은 기념사진도 유념해 본 자료다. “일본군들과 달리 조선포수들의 표정이 안 좋더라. 그걸 보고 조선포수들은 잡기 싫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최민식은 말한다. “산군은 잡는 게 아니다”라고.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지켜야할 선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태생적으로 탐욕의 발현이다. 자국의 정치·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민족·국가의 영토로 확대시키려는 국가의 정책이다. 일제강점기, 그 탐욕의 희생자가 대호이며, 만덕이다. 탐욕은 가속도가 붙어 오늘날 더욱 힘을 발휘한다.

탐욕의 끝은 무엇일까. ‘대호’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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