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떫은 감이 달아질 때…연극 '소년B가 사는 집'

단 한사람이면 족했다. '대환'이가 용기를 내는데 말이다. 자살 시도를 했던 대환이다. 스무살 청년이다. 목에 시뻘건 줄이 남아 있다. 체인으로 목을 감았다. 병원에서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가 일러 준 시내버스 번호는 잊었다. 버스 정류장에 있던 노파에게 용기 내 물었다. 그녀는 친절히 가르쳐줬다. 

대환이는 순간 자신의 죄악을 고백한다. 14살 때 친구를 죽였다. '살인자'로 살았다. 그의 부모, 집 역시 범죄자 집안으로 묶였다. 노파는 한동안 잠잠했다. "그래, 그랬구나." 그게 전부다. 대환은 엄마에게 말했다. "처음으로 사람하고 이야기를 한 기분이더라."

"나라고 왜 안 슬펐겠어, 왜 안 무서웠겠어?!" 대환이의 외침은 사회에서 매장당한다. 살인자라는 빨간 딱지만 보인다. "딱 하루였어. 그게 내 전부는 아니잖아." 극 중간 대환이의 울부짖음이다. 

대환이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 노파를 만난 이후 '지호'네 가족에게 사과하러 제주도로 떠난다. 지호는 한 때 가출했던 대환이가 같이 살았던 친구다. 그런데 때려 죽였다. 함께 살던 지호가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잔다'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대환이는 떠나기 직전 엄마에게 말한다. "그래도 나 엄마 아들이지?"

화려한 연출, 무대구성 없이 대본의 뚝심이 몰입도를 높인다. 배우들의 연기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병원에서 홀로 돌아온 대환이를 보고 안심의 미소를 짓다 이내 어두워지는 아빠 역의 이호재는 가슴 한켠에 희망을 품고 산다. 지호네 가족에게 가겠다는 대환이를 막아서는 엄마 역의 강애심은 온몸으로 "100번, 1000번 우리가 대신 사과할 테니 너는 가지말라"고 붙잡는다. 대환 역의 이기현은 내내 무표정 속에서도 삶에 대한 끈기를 되새긴다. 

대환이 엄마는 막판 눈시울을 붉힌다. "불행이 우리를 찾아왔다. 이유 없이 왔다 간 것을 인정하는데 오래 걸렸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이 떠오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미성년 살인자' 대환이네 가정의 불행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어슴푸레 빛이 비치듯 희망이 드러나는 순간이 절묘하다. 극 중간에 설 익어 떫은 감을 먹고 맛 없어 하는 딸 '윤아'에게 엄마는 말한다. "때가 되면 더 달아진다"고. 대환이가 떠난 뒤 엄마와 윤아는 감을 나눠 먹는다. 그 떫었던 감은 어느 새 달아져있다. 

억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은유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설 익었던 대환이는 지금 그 때의 그가 아니다. 14세의 대환이, 즉 '소년B'가 그를 다시 찾아와도 예전과는 달라져 있을 테다. 이보람 작가·김수희 연출은 약 100분의 러닝타임 안에 성장, 가족, 사회 이야기를 담아내는 묘를 발휘한다. 

지난해 CJ크리에이티브 마인즈 선정작으로 초연했다. 국립극단의 '젊은연출가전'을 통해 재공연한다. 14~26일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1만~3만원. 국립극단. 1688-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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