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70대 한인이 카리브해 최대의 관광지에서 밤마다 비쳐지는 일본전범기 조명을 퇴출시켰다고 8일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가 보도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일전퇴모(일본전범기퇴출시민모임)’ 백영현(72) 공동대표. 백 대표는 도미니카공화국 최대 휴양지 푼타카나(Punta Cana)의 파라다이스호텔 광장 앞에서 매일 밤 일본 전범기 컨셉의 조명이 비쳐지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 달여에 걸친 노력 끝에 퇴출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푼타카나는 도미니카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2시간30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연간 600만 관광객 중 400만 명이 방문하는 카리브해 최대의 관광지로 잘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파라다이스호텔 앞 광장은 모든 관광객들이 한 번쯤 지나는 명소이다.
백영현 대표가 이곳에서 밤마다 일본 전범기인 ‘욱일기’ 조명 쇼가 펼쳐지고 있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것은 우연이었다.
두 아들이 부모의 결혼기념일 깜짝 선물로 도미니카 여행을 예약해주어 지난해 11월2일 일주일 일정으로 휴가를 떠나게 됐다. 며칠 후 부인 김영순씨와 함께 밤 산책을 나온 백영현 대표는 광장 한가운데 작은 분수대 위에 투사되는 조명을 보고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마치 핏빛처럼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조명이 노골적인 일본 전범기 형상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머나먼 카리브해의 휴양지 한복판에서 이렇게 노골적인 전범기 이미지가 비쳐지고 있다니 말입니다.”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일본 체조 대표팀이 전범기 컨셉의 유니폼을 입고 나온 것에 격분해 뜻있는 한인들과 함께 ‘일전퇴모’를 결성하고 일본의 전범 상징물 퇴출에 노력을 기울여온 그가 아닌가.
휴가 일정을 중단하고 이 일에 매달렸다. 조명을 비추는 파라다이스 호텔 매니저를 만나 어찌 된 일인지 조사했다. 파라다이스 호텔은 스페인의 억만장자가 소유한 것으로 광장의 중심에 일본 레스토랑 등 일본 관련 상점들이 많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기 때문에 볼거리 차원에서 조명 디자인을 연출한 것이었다.
도미니카에서도 유명한 전문가에게 의뢰해 일본의 상징물을 정교한 조명 디자인으로 형상화, 서비스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영현 대표는 호텔 관계자에게 “당신들이 매일 밤 비쳐주는 저 조명 디자인이 아시아의 나치 깃발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처음 듣는 얘기”라고 눈을 크게 떴다.
백영현 대표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저 깃발을 앞세워 아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생체실험을 했다. 수십만 명의 젊은 여성과 여자 아이들을 납치해 성노예로 삼았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상 가는 참혹한 범죄를 상징하는 것을 이렇게 평화롭고 많은 관광객들이 오는 곳에서 버젓이 비춘다는 것은 경악할 일”이라고 질타했다.
연 이틀을 찾아가 조명 중단을 요구하자 호텔 매니저는 “일단 자료를 보내달라. 사실을 확인하고 오너에게 보고하겠다“고 답변했다. 곧바로 뉴욕에 돌아온 백영현 대표는 그간 모은 일본 전범기 자료들과 함께 서한을 발송했다. 그중에는 욱일기와 나치의 하겐크로이츠(꺾어진 철십자가)가 나란히 걸린 채 일본과 독일 군부가 함께 한 사진도 있었다.
그러나 설득은 결코 쉽지 않았다. 푼타카나는 11월부터 이듬해 4월이 관광 성수기이고 특히 12월은 축제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여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조명 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백영현 대표는 압박과 설득을 병행했다. 뉴저지에서 환경민권단체인 1492 그린클럽을 창설하기도 한 그는 “1492는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그때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1492년 컬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이스파뇰라 섬이 바로 오늘의 도미니카가 있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492 그린클럽엔 미국의 연방 정치인을 비롯한 3000명의 회원들이 있다. 아시아의 나치 깃발인 전범기 조명이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 사회에 알려지면 큰 파문이 벌어질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와 함께 “최근 들어 중국인 관광객이 크게 늘고 있다는데 중국은 한국과 함께 일본 전범기의 최대 피해자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 나치 깃발을 보는 것처럼 끔찍한 체험을 아름다운 이곳에서 받는다면 결국 누구 손해가 되겠냐?”고 설득했다.
이 과정에서 중부뉴저지교회 장충현 장로 등 미주 한인들과 공조 활동에 들어갔다. 도미니카에 파송나간 한인 선교사에 연락해 압박을 가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특히 도미니카에서 26년 간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는 A 선교사는 푼타카나에서 숙식을 하면서 매일 호텔측은 물론, 시 관계자와 접촉, 전범기 조명을 거두도록 총력을 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백영현 대표는 A 선교사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도미니카에서 날아온 ‘평화의 비둘기’ 한 마리였다.
“백 선생님. 광장을 뒤덮은 피비린내 나는 욱일기의 조명이 드디어 오늘 부로 이곳에서 내려졌습니다. 푼타카나를 찾아오는 400만 명 이상의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에게 더 이상 2차대전, 특히 태평양전쟁의 악몽과 상처의 상징인 욱일 전범기가 이제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정의로운 젊은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하늘이 내려주신 성탄 선물이 될 이 일을 위해 애쓰신 미국에 계신 여러분과 함께 보람을 나눕니다. 즐겁고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제 산토도밍고로 돌아갑니다. 도미니카에서 12월23일 000드림.’
백영현 대표는 “하늘에서는 당연스러운 축복일지 모르지만 이 땅의 나에게는 기적같은 일이었다”면서 “나도 모르게 모아진 두 손을 바라보며 카리브해의 푼타카나 광장에 몰려 있는 관광객들 사이에 휩쓸리는 환상에 빠지며 행복하게 새해를 맞을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