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교도통신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병역을 거부해 수감됐던 일본계 미국인 생존자들의 회상을 실었다.
이 통신은 "자신의 모국과 부모의 모국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서두로 시작했다.
1941년 시작된 일본과 미국의 전쟁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계 미국인 2세에게 어려운 문제로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은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미군에 지원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전장에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수감된 사람도 있었다.
교도통신은 1945년 종전으로부터 70주년을 맞아 당시 병역을 거부했던 두 사람의 회고를 실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뒤 일본에서 자라다가 고등학교부터 미국으로 다녔던 이리야마 마사오(入山正夫) 씨(93,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민스터 거주)는 '노노보이(No-No Boy)'였다.
노노보이란 미국 정부의 어떠한 명령에도 따를 것인지 여부를 묻는 '충성 테스트' 중 2문제에 '노’'고 대답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들은 위험분자로 간주됐다.
그에게는 와카야마현(和歌山県)의 고향집에 부모형제가 남아 있었기에 "동생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 전장에서 만난다면…"이라고 고뇌했다.
전쟁 발발 후 일본계 미국인은 미국 정부로부터 적성(敵性) 외국인으로 분류돼 전국 11개소의 강제 수용소에 격리됐다.
노노보이는 각지의 수용소에서 캘리포니아 주와 오레곤 주 경계에 설치된 툴레이크(Tule lake) 수용소로 이송됐다.
툴레이크 수용소는 '수용소 중의 수용소'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사막 바람이 사납게 불어왔고 봄에도 눈이 날렸다.
1946년 3월까지 갇혀있었다는 이리야마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 때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온화하게 말했다.
한편 부모님이 오카야마현(岡山県) 출신인 구로미야 요시토(黒宮ヨシト)씨(91,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알함브라 거주)는 개전 당시 예술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으나 일가 모두 와이오밍 주 하트 마운틴(Heart Mountain) 수용소에 갇혔다.
그는 그 후 수용소 안에서 징병 대상이 됐으나 입대를 거부했다.
그는 "미국 시민인 우리들이 강제 수용되는 것은 미국 법률에 위배된다. 가족을 자유롭게 해준다면 출정할 것"이라고 주장해 병역 거부로 체포됐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백인인 재판이 시작되었으나 구로미야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재판장은 일본계 미국인인 피고를 깔보는 태도였고 변호사도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재판 결과는 징역형이었으며 그는 "놀라지 않았다"고 되돌아 봤다.
구로미야는 전쟁이 끝난 뒤 건축가로서 대학 캠퍼스를 설계하는 등 활약했지만 병역 거부자 중에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계 미국인 사회에서 백안시 당해 실정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많다.
그는 "그 때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설령 지금 판사가 같은 질문을 한다고 해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