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나라 키프로스의 영국령인 아크로티리 영국공군기지(RAF)에서 난민들에 의한 소요사태가 잇따르면서, 영국 정부가 사태 해결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 하지만 영국 국방부는 “키프로스가 영국으로 갈 수 있는 루트가 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 난민 문제를 키프로스 정부에 떠넘기는 듯한 모습이다.
3일(현지시간) BBC와 가디언은 최근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난민 소요 사태를 보여주는 사진과 동영상들을 입수, 지난 달 31일 키프로스 데켈리아에 있는 RAF에서 난민들이 임시 수용소에 불을 질렀다고 보도했다.
난민 여성(27)은 음성 메시지를 통해 “전쟁을 피해 달아나다 실수로 키프로스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오히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며 “우리는 마치 감옥에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소년은 날씨가 추운데도 신을 신발이 슬리퍼 밖에 없다고 말했다. 담장에 올라가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다”고 외치거나, 영국 경찰관이 다가오자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난민들은 처우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지난 2일 난민들이 수용된 RAF지역을 방문한 타키스 네오피토 적십자 키프로스 지부 대표는 자세한 언급을 피하면서도 “난민들이 매우 절망한 상태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21일 터키에서 출발해 그리스로 가려던 난민선 2척이 키프로스 내 영국주권구역(SBA) 중 한 곳인 아크로티리 공군기지(RAF)에 도착했다. 선박에는 어린이 28명을 포함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레바논 난민 총 114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에서 망명신청을 하고자 했으나, 표류한 끝에 키프로스 영국령 기지로 들어왔다.
난민선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영국 국방부는 성명을 내 “2003년 키프로스와 체결한 조약에 따라 키프로스 내 SBA로 온 난민은 키프로스에게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유엔난민기구(UNHCR)와 키프로스 정부는 영국에게 법적 책임이 있다며 반박했으나, 영국 국방부가 난민 수용을 강하게 거부하자 키프로스 외무부 측은 “키프로스에게 책임이 없지만 망명 신청을 접수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2003년 영국과 키프로스간 체결된 조약에 따르면, 키프로스의 SBA로 '직접'들어온 망명 신청자들은 영국에게 책임이 있다. 또 영국은 망명 신청자들이 키프로스에 머물기 원할 경우 제반 수속에 들어가는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영국 국방부는 키프로스에서 발생한 최근 소요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난민들이 대우를 잘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임시 난민수용시설에서 발생한 몇몇 사건들을 알고 있다”며 “난민들은 음식과 거주지, 프라이버시, 통신 등 필요한 것들을 잘 공급받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유엔(UN·국제연합) 관리들이 통상적인 기준이 넘는 것으로 평가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키프로스 정부와 협력해 이 상황을 가능한한 빨리 해결하도록 하겠다”면서도 “영국 정부는 영국으로 갈 수 있는 새로운 난민 루트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난민 선박이 SBA 인근 해안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1998년 이라크와 시리아, 쿠르드 난민을 실은 배 한 척이 SBA에 도착했다. 그러나 영국공군기지의 법적 정치적 지위 때문에 67명의 난민들은 17년간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다. 지난 21일 키프로스에 도착한 난민들은 1998년에 들어온 난민들과 분리 수용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