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배우마다 인생캐릭터가 있다. 뮤지컬배우 이지혜(26)에게는 라이선스 뮤지컬 '팬텀'(제작 EMK뮤지컬컴퍼니)의 '크리스틴 다에'다.
중앙대 성악과 출신인 이지혜는 '팬텀'(박효신·박은태·전동석)을 만나 오페라 극장의 새로운 디바로 성장하는 크리스틴 다에 역에 알맞다. 팬텀의 가르침을 받은 뒤 비스트로 장면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가장 어린 크리스틴으로서 드라마틱한 성장 서사를 쓴다.
공연 초반 길거리에서 악보를 파는 크리스틴이 순박한 소녀의 얼굴로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할 때 충주에서 올라와 홀로 고된 서울살이를 하는 실제 모습도 겹쳐진다.
이지혜는 '첫 사랑 전문 배우'로 통한다. 데뷔작인 2012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를 비롯해 '베르테르'의 롯데, '스위니 토드'의 조안나, 적극적인 캐릭터로 돌변한 '햄릿'의 오필리어 등 모두 극 중 남자 주역의 처음 사랑을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크리스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스통 르루의 원작(1910)을 극작가 아서 코핏과 작곡가 모리 예스톤이 옮긴 '팬텀'에서 그녀는 좀 더 인간적인 성장을 한다. 흉측한 얼굴을 한 팬텀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지만 결국 사랑을 넘어 인간적으로 대한다.
"크리스틴은 성장이 명확하게 보이죠. 꿈을 실현하고 사랑을 알고 그녀가 살아가는 과정을 다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성취감이 더 느껴져요. 팬텀을 대할 때는 특히 '넌 나의 음악'을 부르면서 울지 않으려고 해요.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훨씬 더 많은 감정이 담겨져 있어, 조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실제 크리스틴과 닮은 점에 대해서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라고 까르르 웃는다. "처음에 아무것도 갖지 않고 있는 부분이 비슷해요. 크리스틴이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할 때 남일 같지 않았죠. 저 역시 대학을 마치고 스물세살 때 무적정 서울로 와서 일을 시작했거든요.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도 같고요."
'팬텀'은 지난해 초연 때 오디션을 본 작품이다. 하지만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함께 하지 못했다. 르루의 소설은 '팬텀'에 앞서 국내에 선보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원작으로도 유명한데 이 작품에서 크리스틴을 보며 뮤지컬배우를 꿈 꿨던 터라 이번 시즌 캐스팅은 그녀에게 감사와 영광이라고 했다.
이지혜의 캐릭터 해석이 탄탄한 이유다. "소리적인 성장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막 상경한 소녀의 발성에서는 날 것의 느낌을 주고 싶었죠. 팬텀에게 레슨을 받는 장면에서도 연출님이 노래를 못 해달라는 주문을 하셨고요. 호호. 하지만 레슨에서 푸가(하나의 주제가 성부 또는 악기에 지속적으로 모방 반복되는 것)가 진행되면서 점차 노래 실력이 늘어요. 표정과 몸짓에서도 여유를 찾아가죠. 이 부분은 계속 연구 중이에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동요 대회에 나간 뒤 지도 교사의 추천으로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이지혜는 'MBC 어린이 합창단' 등을 거치며 꿈을 키웠다. 어릴 때 장래 희망란에 성악가도 아닌 '조수미'라고 적을 정도로 꿈이 확실했다. "집에서 엄마 옷을 입고 엄마 화장품을 바르고 연기를 하는 것이 제 일이었다"고 웃었다.
유학을 가려다 국내 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꾸고 준비하던 중 그녀의 인생이 바뀌었다. 스타가 되는 이들의 익숙한 신데렐라 스토리지만, 그 설렘으로 진부하지 않은 과정을 그녀도 겪었다. 친한 선배를 따라 '지킬앤하이드'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엠마 역에 덜컥 발탁된 것이다.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이 여배우는 어느덧 당당히 주역 자리를 꿰차고 있다. 벌써 뮤지컬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아직 신인이고 한 작품 시작할 때마다 조심스럽지만 여전히 행복하다"고 했다. 점차 여유를 지닌 배우가 되는 것이 바람이다. "초반에는 말 그래도 한치 앞만 봤어요. 이제 실수를 해도 크게 당황하지 않아 이제 좀 뮤지컬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호호."
하지만 전체 공연 기간의 절반 이상 회차가 남은 '팬텀'이 다시 그녀에게 도전이 되고 있다. "제가 넘은 산 중에 역대급으로 가장 큰 산이 되고 있어요. 이 산을 조금씩 오르면서 한뼘 한뼘 성장하고 있어요. 너무 벅차서 벌써부터 한 회 공연이 끝날 때마다 아쉽네요." 2017년 2월26일까지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 보너스 트랙 : 이지혜 인생을 바꾼 뮤지컬 넘버
▲'지킬앤하이드' 중 '원스 어폰 어 드림' : 데뷔 작품의 데뷔곡이에요. 아무것도 모를 때 불렀고 20대 중반이 넘어 다시 불렀을 때 노래의 슬픔을 좀 더 알 것 같더라고요. 엠마의 마음에 대해 아픈 생각만 하게 하는 노래죠.
▲'베르테르' 중 '하나님' : 연습하면서 정말 힘들었던 노래에요. 저를 너무 괴롭혔던 노래인데 덕분에 제가 한 꺼풀 벗겨진 듯했죠. 배우로서 성장케 한 작품이죠.
▲'팬텀' 중 '더 비스트로' : 크리스틴이 꿈을 이루는 장면인데, 실제 제 꿈도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장면이죠. 그 때는 극 안의 비스트로에서 지켜보는 손님 뿐 아니라 실제 관객들까지 한마음이 되는 듯한 기분이 느껴져요. 크리스틴을 하나 같이 다 응원해주시는 거죠. 무대에서는 항상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때만큼은 기댈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