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한민국 19대 대통령' 문재인이 걸어온 길

'문재인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문 대통령은 10일 치열한 당내 경선과 본선 과정을 뚫고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2년 대선에서 패배의 쓴맛을 봤던 문 대통령으로서는 1,603일만에 '대권 재수'에 성공한 셈이다.

◇사법연수원 차석졸업…인권변호사 길 걸어

 문 대통령은 1953년 피란민 출신으로 경남 거제에서 막노동하는 아버지와 달걀 행상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는 생업으로 장사를 했으나 거래처의 부도로 인해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그는 집안의 가난으로 인근 성당에서 구호식량을 받아오는 역할을 했고, 그때의 인연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영세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됐다.

문 대통령은 당시 부산에서 일류 학교로 꼽히던 경남중,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자 했으나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의 반대로 법대로 진로를 틀었다. 재수 끝에 경희대에 입학했고, 아내인 김정숙 여사를 만났다.

그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1975년 4월 경희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유신반대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됐고, 학교에서 제적됐다. 이후 강제징집돼 특전사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제대후 복학해 사법시험 2차까지 치른 뒤, 시위 참여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이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 차석졸업이라는 영광을 얻었지만 시위 전력 탓에 판사 임용의 꿈은 좌절됐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당시 국내 최대 대형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뿌리치고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 법률사무소'를 열고 동업을 택했다.

두 사람의 법률사무소는 부산은 물론 인근 울산·창원·거제 등 지역 노동인권사건을 총괄했다. 그는 자연스레 재야운동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됐고, 87년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상임집행위원을 맡아 6월항쟁을 주도했다.

◇노무현의 영원한 친구…"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 해"

노 전 대통령의 언급을 종합해보면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게 '영원한 비서실장'이라기보다 '영원한 친구'에 가깝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부산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문 당선인을 향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고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재직 초기 과로와 스트레스로 치아 10개가 빠져 임플란트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문 대통령은 2004년 2월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지만 노 전 대통령 탄핵안 국회 통과 직후 귀국해 법률대리인을 맡았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 후 3일 뒤,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다시 입성했다. 이후 2번째 민정수석 재임 중 '부산사람이 왜 참여정부를 부산정권으로 생각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발언이 문제가 돼 사임했다. 2007년 3월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아 2007년 남북정상회담과 한미 FTA 비준 과정에 참여했다.

그는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공식 발표하면서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 헌화 때 백원우 의원이 '정치보복 사죄하라'고 고함을 치자 상주로서 이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였다. 비극의 순간에도 담담함을 잃지 않았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를 정치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

문 대통령은 2011년 발간한 자신의 자서전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는 말과 함께 정치에 입문했다.

◇'운명이다'…盧 서거 후 정치입문, 2번의 대선출마

 문 대통령은 2011년 야권통합의 기치를 내건 '혁신과 통합'의 상임공동대표로 합류하며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2012년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그해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대선에서 안철수 당시 무소속 후보와 우여곡절 끝에 단일화를 이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와 양자대결을 펼쳤지만 3.6%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문 대통령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단식농성을 진행하자 말리러 갔다가 10일간 동조 단식을 벌이기도 했다. 2015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선거에서 박지원 의원과 맞붙어 3.5%포인트 차이로 신승을 거뒀다.

그는 당 대표로 치른 4·29 재보선에서 패배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이후 안철수 의원에게 당 혁신위원장과 문·안·박 연대(문재인·안철수·박원순)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안 의원은 '친문패권주의'를 비판하며 새정치연합을 탈당했고 정치적 결별 수순을 밟았다.

이후 비문재인계 의원이 대거 탈당하며 당이 절체절명의 위기로 접어들었다. 이때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멘토인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비상대책위원장에 앉히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문 대통령은 또 김병관·김병기·김정우·박주민·문미옥·조응천·표창원 의원, 양향자 최고위원 등을 영입해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고, 이는 결국 적중했다.

문 대통령은 총선 과정에서 '반문정서'를 의식, "호남에서 지지를 못 받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그 결과 수도권 등에서 표심 결집을 이뤘으나 호남에서는 국민의당에 참패했다. 이후 문 대통령은 총선 당시 정계은퇴 선언에 대해 '전략적 발언이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그는 지난해 8월 전당대회에서 '친문재인' 인사를 대거 지도부에 당선시키며 대선으로 가는 비단길을 깔았다. 당내 경선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이재명 성남시장을 제치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공식 선출되며 본선 무대에 올랐다. 대선 본선 과정에서 잠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박빙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국민의 최종 선택은 문 당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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