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 출신 독립운동가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신작 영화 '박열'이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대박행진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1902~1974) 의사에 세간의 관심 쏠리고 있다.
6일 문경시와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선생은 1902년 3월 12일 광산촌인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 가문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농업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해졌다.
조선총독부 후원 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이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저임금, 인권유린 등 각종 폐해가 뒤따라 지역주민들의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었다.
무정부주의자였던 선생은 18세 때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 전개를 위해 김찬, 조봉암 등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을 조직했다. 당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김약수, 백무, 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
도쿄 고학생 동우회와 혈권단 등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선생은 김약수, 원종린 등 유학생들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다. 일본에서 만나 결혼한 부인(가네코 후미코)과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항일세력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했다.
1922년 12월에는 김약수 등과 결별한 후 직접적인 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를 조직해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단체들과 연대활동에 돌입했다. 1923년 4월에는 흑우회와 별도로 반일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했다.
선생은 외국에서 폭탄을 반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를 시도했다. 의열단의 중요 간부인 김한을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하는 등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했다. 세차례에 걸친 폭탄 반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1923년 가을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게 되자 또다시 거사계획을 세웠다.
선생은 자신의 명성을 듣고 도쿄로 찾아온 김중한에게 폭탄구입 여부를 타진했지만 구입비용 때문에 잠시 보류했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도쿄에서 대지진(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일제는 대지진을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악용했다. 이 때 6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무참히 희생당했다. 또 선생과 부인, 불령사 회원들을 포함해 조선인 6000여 명이 구속됐다.
선생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부터 1925년 6월까지 총 21회에 걸쳐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선생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선생은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취급 중지, 동등한 좌석 설치, 조선 관복 착용, 조선어 사용 등 4개 조건을 요구해 일부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선생은 조선의 전통 관복을 입고 출두해 반말투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이어갔다. 미리 써 두었던 '음모론',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 등의 글을 읽으며 일왕의 죄를 폭로하기도 했다.
재판과정에서 사형판결 선고가 내려지자 박열 의사는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했다. 사면장을 받은 부인은 현장에서 이를 갈갈이 찢어버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저항의지에 감동한 일본 재판장이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하며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지만 선생은 치바형무소, 부인은 도치키형무소로 옮겨지면서 둘 사이는 살아생전 영원히 이별을 고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선생은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형무소에서 44세의 중년이 돼 석방됐다. 옥중에 있는 동안 일제는 선생과 부인을 상대로 항일의지를 꺾기 위해 수차례 사상전향 공작을 펼쳤지만 그 때마다 실패했다.
이후 무려 22년 2개월 동안 옥중에서 끊임없는 투쟁으로 살아있는 독립운동 정신을 보여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인은 1926년 7월 도치키 형무소에서 타살로 의심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교도소측에서 서둘러 가매장한 유골은 옛 동지들의 노력으로 비밀리에 선생의 친형에게 전해져 문경 팔령산에 묻혔다.
선생이 석방되던 날 도쿄에서 열린 '석방 환영 대회'에서 그를 옥중에서 감시했던 형무소 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가 수천명이 운집한 조선동포들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이날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아들을 선생의 양자로 바치고, 이름 또한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해방이 되자 선생은 1946년 10월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해 재일조선거류민단을 발족시켰다. 초대단장에는 선생이 추대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 때 인민군은 선생을 북으로 데려 갔다.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문경시와 박열의사기념사업회는 이러한 박열 의사의 애국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2012년 생가 터에 박열의사기념공원 및 기념관을 건립했다.
기념관에는 박열 의사의 출생과 일대기, 유품과 사료를 전시해 박열 의사는 물론 평생의 동지이자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기념공원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와 박열의사 생가지가 보존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