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데일리 서현정 기자] 13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자 군사정권의 마지막 권력자,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서거했다. 향년 89세다.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쿠데타로 신군부 핵심 세력으로 한국 정치사에 등장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의 2인자 반열에 오르면서 여당인 민정당 대표에 이어 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노 전 대통령은 민정당 대표 시절 거센 민주화운동으로 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고, 5공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정치 민주화 실현에 일정 정도 역할을 했다.
하지만 퇴임 후 비자금, 군사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으로 옥살이를 하는 등 시련을 겪은 비운의 정치 지도자로 평가된다.
◆어려웠던 유년시절…‘하나회’ 결성 후 승승장구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출생했다. 면서기를 지낸 부친 노병수씨와 어머니 김태향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때 부친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숙부 아래 유년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로 이 시기에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두 사람은 이후 '바늘과 실'의 관계를 유지했다. 육사 졸업후 1960년 대위로 진급, ROTC 창설 요원으로 서울대 사대 교관으로 근무했다. 육사 11기로 정보 방첩 등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56년 보병 소대장을 지낸 후 미국으로 유학해 특수전학교 대인 심리전 과정을 마쳤다. 이후 육사 11기를 주축으로 하는 사조직 '하나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방첩부대 정보장교, 방첩부 방첩과장을 거져 육군본부 정보과장, 방첩과장을 지내며 정보수집, 민심동향 파악 등의 업무를 맡았다. 1968년 수도사단 대대장, 1971년 보병 연대장, 1974년 공수특전여단장을 지냈다.
197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 '하나회'는 군부 내 주도권 장악과 정권 획득을 위해 '12·12'를 일으켰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12·12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됐다. 민주정치 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도 참여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5.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데 이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 진압했다. 같은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상임위원장이 됐고,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 간선으로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노 전 대통령도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는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해 국군보안사령관이 됐고, 1981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발을 들였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민정당의 대표최고위원에 임명, 당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전 전 대통령이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인 1981년 외교안보담당 정무 제2장관이 됐다.
그는 전 전 대통령 재임기간 중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등을 거치며 명실상부한 2인자로 자리잡았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돼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임명됐고, 1987년 6월 대통령 후보로 선출, '보통사람 노태우'를 선거 구호로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전국에서는 반정부 6월 민주항쟁이 불붙고 있었다.
◆6.29 선언·13대 대통령 당선…북방 외교 성과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권이 주장해온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 민주화 요구를 전격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7월에 이를 전격 수용, 정국을 대화합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6·29 선언은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결단이었던 것으로 선전됐지만, 정권을 안정적으로 이양하기 위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사전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야권의 정치 라이벌이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일화에 실패함에 따라 야권의 표는 둘로 나뉘었고, 12월 대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국 득표율 36%로 당선, 1988년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중국, 러시아 등 공산권과의 수교에 공을 들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갖고 한·러간의 국교를 회복시켰고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유엔에 북한과 함께 가입했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을 열고 문화·체육의 교류를 하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에 나섰다.
1991년 11월13일에는 남북 공동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각각 추진하려 했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대통령 퇴임 후 건강 악화로 병원 들락날락
퇴임 후인 1995년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억원설'을 폭로했다. 검찰 수사로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나자,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재임 기간 중 5000억원을 기업으로부터 받았고 1700억원이 남았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 등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항소심을 통해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으로 감형됐다.
노 전 대통령은 또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비자금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1997년 김영삼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석방됐다.
그는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돼 사실상 칩거 생활을 해왔다. 2008년에는 소뇌가 점점 줄어드는 희귀병 소뇌위축증 진단을 받아 투병했고, 수차례 폐렴 증세로 입원과 퇴원을 거듭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증세가 악화돼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영국·독일·프랑스 대훈장 등을 받았으며,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 '노태우 회고록' 등을 집필했다. 유족은 배우자 김옥숙 여사와 아들 재헌, 딸 소영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