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를 앞세운 영화들이 연거푸 실패하고 있다. 2012년 박훈정 감독이 연출한 '신세계'의 성공 이후 같은 장르의 영화가 속속 개봉하고 있지만, 100만 관객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우는 남자'와 '하이힐'은 14일 현재 박스오피스 6, 7위에 올라 있다.
두 영화는 장동건(42)과 차승원(44) 두 톱스타가 주연한 작품이다. '우는 남자'의 감독은 2010년 '아저씨'로 628만 관객을 끌어들인 이정범(43) 감독이다. '하이힐'은 충무로의 재주꾼 장진(43) 감독이 연출했다. 하지만 두 영화는 더이상 관객을 모으기 힘들어 보인다.
12일 개봉한 누아르 '황제를 위하여'(감독 박상준)도 상황이 좋지 않다. 전야 개봉한 11일 3만9296명, 개봉 날에는 5만1772명이 봤다.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감독 더그 라이먼)와 한국영화 '끝까지 간다'(감독 김성훈)의 흥행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누아르라는 장르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놨다. "연출력과 서사 구조 모두에서 결함이 많다"는 지적이다. "최근 한국 장르영화가 이야기를 잘 구축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장르 자체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는 남자'는 실수로 한 아이를 죽인 킬러가 아이의 엄마마저 죽이라는 조직의 명령을 거부하고, 속죄를 위해 여자를 지키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주인공의 고뇌가 관객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평이다. 단순히 킬러가 어린 나이에 엄마에게 버려진 과거가 있다는 설정만으로는 살인 기계와도 같은 그가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저씨'의 화려한 액션을 기대했던 관객이 '우는 남자'의 총기 액션에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흥행 부진의 이유로 꼽힌다.
'하이힐'은 영화의 설정부터 관객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여성성을 가진 형사를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참신한 시도라고 볼 수 있지만, 누아르 특유의 어둡고 음침한 세계의 강한 남성을 기대하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이다.
장진 감독 특유의 유머 또한 더는 관객을 웃기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이번 흥행 참패에 한몫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황제를 위하여'는 '신세계'를 성공으로 이끈 박성웅(41)과 항상 평균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이민기(29)를 주연으로 내세웠지만, 누아르 흉내만 내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동력이 약해 관객에게 매력적인 작품이 되기 힘들어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영화계 관계자는 "한국관객의 수준이 높아졌다. 스타일만으로 흥행이 가능하던 시기는 지났다"면서 "탄탄한 이야기 구조 없이는 더이상 성공하기 힘들다"고 짚었다.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는 홍콩 누아르 영화를 모방했다는 평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탄탄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누아르 장르 영화의 실패 이유를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최근 한국사회의 우울한 분위기로 인해 어둡고 침울한 누아르 영화가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송낙원 교수는 "누아르 영화가 그리는 세계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더 참혹한 상황이다 보니 관객이 따뜻한 영화에 더 반응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최근 보도되는 사건들은 누아르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고전적인 누아르는 1950년대 미국 탐정영화 장르에서 시작했다. 1950년대는 2차 대전의 승리로 미국 사회가 풍요를 구가한 시대다.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 가장 우울한 장르 중 하나인 누아르다. 흑백의 강한 콘트라스트 조명과 축축이 내리는 비, 음산한 도시의 뒷골목, 사건을 일으키는 팜파탈, 냉소적이며 안티 히어로에 가까운 탐정 주인공, 선악이 뒤엉킨 플롯은 풍요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며, 어두운 그림자들에 대한 매혹을 표현했다.
반대로 가장 암울한 시기였던 1930년대 대공황기에는 화려한 뮤지컬 장르가 꽃피우기도 했다.
1970년대 프랑스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이 만들어낸 프랑스 누아르나 1980년대 우위썬 감독이 재창조한 홍콩 누아르, 1990년대 퀜틴 타란티노 감독과 코언 형제를 대표로 한 미국 인디 작가들의 느와르 장르 재해석의 성공에는 그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했고, 누아르는 그런 사회의 탐욕과 욕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대정신을 갖고 있었다.
올해 한국 영화 시장에서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누적관객 416만5111명),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누적관객 404만1114명),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누적관객 396만2901명) 등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예외 없이 성공을 거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모티브 삼아 상식을 이야기한 '변호인'의 1000만 관객 돌파나 863만 관객을 넘어선 코미디 영화 '수상한 그녀' 성공 또한 한국사회의 현실과 관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