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한창 때라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지금 제 나이가 가장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요.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20, 30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당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까요. 50대에 원하는 삶을 살고 있나 궁금해서 미래로 가고 싶죠. 호호호."
뮤지컬배우 최정원(45)은 나이를 먹고 싶게 만든다. 그 흔한 수술 한 번 하지 않은 얼굴에는 주름이 들어있다. 하지만 내내 환한 웃음을 짓는 그녀에게는 여느 여배우에 없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1989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로 데뷔한 최정원은 '맘마미아!' '브로드웨이 42번가'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스' 등을 통해 25년간 뮤지컬스타 자리를 지켜왔다.
지난해 말과 올해도 활약은 계속되고 있다. 동명 영화를 뮤지컬로 옮긴 '고스트'에서 강령술사 '오다메' 역을 맡아 호평 받았다. 영화에서 우피 골드버그(58)가 맡아 즐거움을 준 캐릭터다.
욕설 섞인 대사와 기교가 돋보이는 연기는 생동감 자체다. '아가씨와 건달들'의 '아가씨 6번'역 이후 주연을 맡은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하지만 오히려 주연보다 빛나는 순간들을 선사한다. 덕분에 최근 '제8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작년 11월 말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을 시작했으니 7개월째다. 29일 폐막을 앞두고 있다. "'고스트'는 힐링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간 섹시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역을 맡았던 그녀가 "나를 놓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배우의 삶에는 강약이 있는 것 같아요. '고스트'에서는 제 안에 숨어 있는 아줌마스럽고 귀여운 면을 끄집어내려고 했죠. 라이선스 뮤지컬이지만, 창작뮤지컬만큼 캐릭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주인공이라는 짐을 벗으니 애드리브도 자연스레 나오고요. 호호호."
최정원은 날마다 다른 애드리브로 관객들을 웃겼다. 남자주인공 '샘' 역 셋 중 한 명인 주원(27)이 무대에 오르는 날에는 "의사 닮았네"라고 말하는 식이다. 주원이 드라마 '굿 닥터'에서 의사 역으로 인기를 누린 직후 공연 초반의 일이다. 현재는 영화배우 김보성(48)의 유행어 '의리' 등을 사용하고 있다.
"평상시 남을 웃기려고 하는 편이 아니에요. 조금 맹한 이미지가 있고 무서움을 타고, 귀가 얇은 편인데 그런 면이 자연스레 오다메에 묻어났죠."
최정원은 코미디 감각을 이미 선보였다. '프로듀서스' '키스 미 케이트' '아이 러브 유' 등에서 발군의 코미디 리듬을 뽐내며 다양한 면모를 과시했다.
8월2일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뮤지컬 '시카고'에서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2000년 국내 초연한 라이선스 뮤지컬 '시카고'는 이번이 10번째 시즌이다. 최정원은 '시카고' 초연부터 지금까지 한 시즌도 빠지지 않은, 이 뮤지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특히 초연 당시 애인에게 배신당하는 섹시한 매력의 젊은 여성 '록시 하트'를 맡아 2001년 뮤지컬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내내 이 역을 맡다가 2007년에는 옥주현에게 록시를 물려주고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지는, 나이 든 열정의 디바 '벨마 켈리'를 맡고 있다.
"가장 '뮤지컬스러운' 작품이죠. 요즘 주연배우가 춤과 연기만 하는 뮤지컬도 많은데 '시카고'는 노래와 연기, 춤이 33%씩 들어갑니다. 말 그대로 삼박자가 맞아야 해요.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드는 작품이죠."
다시 루시를 맡고 싶지는 않을까. "옥주현, 배해선, 윤공주, 오진영, 지금의 아이비까지 그들이 연기하는 록시를 보면 뿌듯해져요. 다 살아온 것이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의 록시를 보여주죠. 저에게 지금 록시를 하라고 하면 못해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분야는 다르지만, 김희애(47) 김성령(47)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여배우들과 나란히 언급된다. 엄마 또는 선배가 아닌 '여자'로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중년의 여성도 섹시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입증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즐기면서 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는 것 아닐까요"라며 부끄러워했다.
대기실에서 최정원을 만났을 때 그녀의 옆에는 케이크와 과자가 한 보따리 쌓여있었다. 공연장에서 관객을 안내하고 대응하는 '하우스 어셔'를 위한 선물이다. 직접 편지도 썼다. 무대 스태프를 챙기는 배우들은 많이 봤지만 하우스 어셔까지 챙기는 배우는 낯설다. "항상 저를 지켜보는 친구들이죠. 매일 공연장에 서서 똑같은 공연을 볼 텐데 제 모습을 보고 웃고, 울고 그러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최정원은 또 다른 도전에 나선다.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로 주목받은 민병훈 감독의 새 영화 '사랑이 이긴다'로 스크린에 데뷔한다.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는 기쁨에 익숙했죠. 그런데 이제 디테일한 연기에 도전하고 싶은 거예요. 영화를 찍으면서 모니터를 하고 있는데 제 표정 하나하나가 다 보이더라고요. 무대에서는 힘든 부분이죠."
장래를 위해 딸을 철저히 단속하는 엄마 역을 맡았다. 딸 이름 '수아'가 실제 자신의 딸 이름이기도 하지만, 평상시 그녀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런 부분이 재미있을 것 같더라고요."
70, 80세까지 무대에 오르는 것이 꿈이다. "딱히 맡고 싶은 배역은 없어요. 그 상황에서 주어진 역을 최선을 다해서 잘해낼 수 있으면 하죠."
아직도 무대에 오를 때면 가슴이 '쿵쾅쿵쾅'거릴 정도로 떨린다. 죽도록 아픈 가운데도 무대에 오르면 말끔히 나아 "정말 천직"이라는 생각을 내내 한다. "무대에 오른 직후 누군가 제게 돈을 꾸어달라고 하면 기꺼이 꿔줄 정도"라며 너스레도 떨었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대에서 그렇게 날아다니지 못한다. 최정원의 성공 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다. "저는 대놓고 관리한다고 해요"라면서 "몸매를 예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노래를 더 잘 부르고 춤을 더 잘 추기 위해 호흡량을 늘리기 위해서죠. 그런 부분이 저와 관객, 그리고 공연에 대한 예의"라고 전했다.
무대 위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녀에게는 핀조명이 꽂힌다.